외부 필자2008. 11. 14. 21:44

아트폴리가 하이카 다이렉트(온라인 자동차보험회사)의 웹진에 미술 초보자를 위한 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전문을 실었습니다.

‘왕초보와 이규현의 미술이야기’는 미술을 처음 접하는 일반인 왕초보씨와 미술평론가 이규현이 나누는 대화형식으로 쓴 미술 에세이입니다. 이규현은 조선일보 미술담당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와 중앙대에서 교양미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림쇼핑’, ‘미술경매이야기’ 등의 책을 냈습니다.

이 글은 매달 연재할 예정이며, 글은 필자의 시각대로 쓰실 것이므로 때로는 아트폴리의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이 여러분들께서 미술과 가까워지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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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최근 해외에서 열린 미술경매에 대한 뉴스를 좀 봤어요.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팝아트 작가들이 수십억원씩 팔리면서 최고가를 찍었다고 들었는데, 솔직히 만화나 광고 같은 그런 그림이 비싼 명작이라는 게 이해가 안돼요.

이규현: 네, 뉴욕과 런던에서 열리는 현대미술 경매에서 팝아트의 대표작가들은 늘 최고가를 기록합니다. 지난 10월 런던에서 있었던 소더비 경매에서 앤디 워홀의 1976년작 ‘해골’<그림1>이 435만파운드(약 98억원)에 팔렸습니다. 추정가(500만~700만파운드)보다는 훨씬 낮았지만, 그날 경매의 최고가였어요. 10월에 서울옥션이 처음으로 홍콩에 가서 한 경매에서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판화판, 거울, 과일이 담긴 그릇의 정물화’가 96억원으로 최고가에 낙찰됐어요.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작년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전국을 들썩하게 만든 ‘행복한 눈물’(2002년 당시 낙찰가 86억원)의 작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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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워홀 ‘해골’>

왕초보: 그런데 그런 팝아트 작가들의 그림을 보면 솔직히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규현: 옳게 보셨어요. 그런데 바로 ‘누구나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 면이 팝아트가 지향한 핵심이랍니다. 팝아트(Pop Art)는 말 그대로 대중예술입니다. 어느 분야나 그렇지만 예술 역시 그 전 시대에 유행했던 것에 반기를 들면서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나는데, 1950년대에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매우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미술이 대유행이었어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져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전세계에 알려졌지만, 대중들에게는 너무 어렵고 관념적으로 보였지요. 1960년대 들어 팝아트는 이에 대한 반기로,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민주적 미술’이라는 점을 내세웠기에 더 인기를 끌 수 있었답니다. 지금 유명한 팝아트 작가 하면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같은 1960년대 미국 작가들을 떠올리지만, 원래 팝아트는 이보다 이른 1950년대 영국에서 인디펜던트 그룹이라 불리는 작가들이 시작했어요. 리처드 해밀턴의1956년작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 가정을 그토록 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가?(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그림2>’는 팝아트의 시조격으로 볼 수 있어요. TV, 축음기, 통조림, 영화포스터, 싸구려 잡지에 나올듯한 반라 남녀 등의 사진을 붙인 작은 콜라주인데 작품 한가운데에 아예 ‘팝(Pop)’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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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리처드 해밀턴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 가정을 그토록 다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현대문화의 상업성과 소비성을 드러내는 이미지를 덕지덕지 붙여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았고, 주변의 평범한 이미지를 그대로 갖다 써서 작가의 고유한 터치는 일부러 숨긴 점에서 훗날 인기를 얻은 팝아트의 요소를 이미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팝아트의 특징은 영국보다는 미국에서 더 잘 통했습니다. 그래서1960년대초 미국에서 팝아트의 인기는 폭발하고 인정을 받았지요.

왕초보: 그렇군요. 그런데 민주적인 미술이라면서 그렇게 비싸다니……

이규현: 어머, 아주 정확한 지적을 하셨는데요. 초보 수준이 아니시군요. 국제 미술시장 분석기관인 아트프라이스닷컴(artprice.com)이 미국 팝아트의 값이 한창 치솟던 2003년에 낸 보고서에서 바로 그렇게 말했어요. “팝아트는 민주주의를 지향했지만 가격은 별로 민주적이지 않다”고.

왕초보: 저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이규현: 그런데 팝아트가 다 비싸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선구자들이거나 현대에 와서 이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해석한 대표적 작가들의 경우에만 비싸게 거래되지요.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후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뜻입니다.

왕초보: 팝아트가 후세대에 끼친 영향이란 무엇이죠?

이규현: 작품 외형은 대중적이고 단순하지만(flat), 그 속에서 현대사회에 대한 예리한 지적을 읽을 수 있는 게 참된 팝아트의 특징인데, 이런 것을 지금 동서양 수많은 미술작가들 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일본 출신의 작가 다카시 무라카미와 나라 요시토모는 일본 대중문화의 상징인 애니메이션을 모티프로 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나라 요시토모의 그림은 언뜻 보기에는 귀여운 아이의 만화 캐릭터 같지만, 잘 보면 그 귀여운 아이가 무시무시한 칼이나 불을 들고 있어요. 상처 받기 쉬운 현대인의 모습, 순수함과 잔인함을 같이 가진 인간의 이중성 등이 느껴지지요.

왕초보: 팝아트가 그냥 예쁘고 쉽게 보이기 위한 그림은 아니라는 얘기군요.

이규현: 네,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겉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평범하고 예쁜 이미지를 가져다 쓴 것 같지만, 그 아래에서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을 예리하게 읽고 풍자합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보면서 우리는 “저렇게 촌스럽고 유치한 게 어떻게 예술이야?” 라고 묻지만, 작가는 “당신들이 추구하는 것, 당신들이 둘러싸여 사는 게 바로 이런 가벼움 아니냐”고 그림을 통해 되묻습니다. 인기 있는 한국작가인 권기수가 그린 ‘비행(Flying)’ 시리즈<그림 3>에는 개인이 패턴이 되어버리는 군중, 그 군중을 맞닥뜨렸을 때 개인의 심리, 때로는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 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모습을 단순화한 ‘동구리’라는 기호(캐릭터) 때문에 쓱 보기에는 ‘귀여운 그림’으로만 보이는 것이지요. 그 시점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편한 소재를 택하되 그들의 현실을 꼬집는 것, 그래서 팝아트는 한편으로는 아주 시사적이고 정치적인 미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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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권기수 ‘비행(Flying) 시리즈’>

왕초보: 그런데 요즘 젊은 작가들이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지요?

이규현: 물론이지요. 요즘 젊은 작가들의 팝아트에도 이런 주제의식이 들어가 있어요. ‘아트폴리(artpoli.com)’에 있는 작가들을 볼까요? ‘미키마우스 “눈가리고 아웅”(이재홍작)<그림4>이라는 그림은 노골적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팝문화를 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단지 미키마우스가 예뻐서 그린 게 아니라, 미국문화가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다른 나라 문화를 비웃는 것 같은 점을 비웃는 것을 풍자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이유진의 ‘시리즈2’<그림5>라는 작품을 보면, 뉴욕의 명품 거리에 ‘불가리아 매장을 방문하는 것은 앤디워홀의 최고 전시를 보는 것과 같다’라고 씌어 있어요. 작가는 실제 맨해튼의 불가리아 매장 공사 외벽을 보고 그렸다지요. 1960년대에 앤디 워홀은 고급예술과 상업문화의 경계가 어디냐고 질문했는데,이제 상업문화는 예술과 자기들을 동등한 위치에 당당하게 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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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이재홍 ‘미키마우스 “눈가리고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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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이유진 ‘시리즈2’>

왕초보: 겉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빤질대는 것처럼 보이면서, 속으로는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거나 때로는 비판도 한다, 이 얘기군요.

이규현: 네, 그 게 바로 좋은 팝아트 작품의 매력입니다. 오늘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이고요.

Posted by slow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