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필자2008. 10. 22. 00:15

아트폴리가 10월15일에 창간한 하이카 다이렉트(온라인 자동차보험회사)의 웹진에 미술 초보자를 위한 글을 제공하였습니다. 아래에 전문을 실었습니다.

‘왕초보와 이규현의 미술이야기’는 미술을 처음 접하는 일반인 왕초보씨와 미술평론가 이규현이 나누는 대화형식으로 쓴 미술 에세이입니다. 이규현은 조선일보 미술담당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와 중앙대에서 교양미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림쇼핑’, ‘미술경매이야기’ 등의 책을 냈습니다.

이 글은 매달 연재할 예정이며, 글은 필자의 시각대로 쓰실 것이므로 때로는 아트폴리의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이 여러분들께서 미술과 가까워지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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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요즘 현대미술, 현대미술 하던데요, 현대미술 인기가 올라갔다, 현대미술 값이 치솟았다, 하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현대미술은 왜 좋은 건가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 많던데.

이규현>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는 미술작품의 목적이 이전과 완전 달라졌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현실의 사물을 그럴듯하게 재현하거나 특정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능에서 자유로워 지면서 미술은 근대성을 가지고 점점 더 다양한 경향으로 발전해 왔는데, 현대미술은 그런 모습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게 난해한 것이지요.

왕초보> 미술이 근대성을 가지게 되었다니 무슨 뜻인가요?

이규현> 미술을 떠나 예술, 아니 그 무엇이라도 근대성을 가지게 된 것은 진보했다는 뜻입니다. 어느 한 사회가 진보했다면 그건 그 사회가 개개인의 개성과 자유로움, 즉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예술작품 역시 모든 작가가 획일적으로 표현하던 것에서 벗어나 저마다 개성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근대성입니다.

왕초보>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는데요. 화가들은 오래 전부터 이미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요?

이규현> 네, 그래요.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서양미술에서 작가들은 일정한 룰을 따랐습니다. 이를테면 원근법을 지킨다든지, 사물을 그럴듯하게 재현한다든지 하는 것 말이지요. 그런데 19세기 말 인상파 화가들이 서서히 이런 룰을 깨기 시작해서 세잔, 피카소에 이르러 이런 룰은 완전히 깨졌습니다. 그 이후 화가들은 극에 달하도록 개성과 자유로움을 표출해왔지요.

왕초보> 룰을 깼다면 어떤 식으로 표현했나요?



이규현> 예를 들어 옆의 그림을 보세요. 인상파 화가들에게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화가 마네(1832~1883)의 그 유명한 '올랭피아’(1963)입니다. 이 그림은 아래에 있는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를 패러디한 것 같지요?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마네가 가졌던 근대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왕초보> 아 정말, 비슷한 소재로 그렸는데 모든 게 다르네요. 티치아노의 누드는 훨씬 완벽한 포즈와 표정을 하고 있는데 마네의 누드는 뭔가 엉성하고 서툴러 보여요. 앞을 빤히 쳐다보는 여자의 눈빛도 그렇고, 하녀가 흑인인 것도 이상하고. 티치아노 그림에서는 하얀 강아지가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데, 마네 그림에서는 그 자리에 검은 고양이가 있네요.



이규현> 네, 맞아요. 소재선택도 달라졌고, 표현기법도 서툴러 보이지요. 티치아노의 그림은 명암 표현이 절묘해서 여자 몸의 입체감이 완벽하게 재현됐는데, 마네의 누드는 평면적이에요. 뾰족구두를 신고 누워 있는 모습, 남자가 보낸 것으로 보낸 꽃다발 등 그림에 들어간 요소도 참 도발적이지요. 이 그림 이전까지 서양미술에서 중시한 전통적인 룰에 의하면 마네는 그림을 못 그린 것이에요. 하지만 마네가 기술이 부족해서 이렇게 그린 게 아니지요. 마네는 단지 더 이상 사물(모델)을 그럴듯하게 미화하는 것에 예술의 목적을 두지 않은 것뿐이에요. 과거의 전통에 도전함으로써 당시 파리의 현재성을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런 게 현대미술이었던 셈이지요. 하지만 이런 현대미술은 당시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왕초보> 그런데 점점 사회가 근대화하면서 다양하고 개성적인 미술이 받아들여지고, 화가들은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특이해 졌다는 말인가요?



이규현> 바로 그래요. 현대로 올수록 미술은 과거와 점점 더 결별하기 시작했어요. 아예 현실을 재현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지요. 현대미술이 전통적인 미술과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사물의 재현을 더 이상 목적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한 예로 옆의 그림의 제목을 맞혀보실래요? 1950년대에 그린 김환기의 그림입니다.

왕초보> 글쎄, 여인? 항아리? 여인과 항아리?

이규현> 딩동댕! 제목은 ‘여인과 달과 항아리’(1950년대)에요. 김환기는 여인과 달과 항아리가 가진 조형적인 요소, 그 곡선미의 어울림을 보여주려고 이 소재들을 그린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그림의 제목을 대충이나마 맞힐 수 있고, 이 그림을 볼 때 어렵지 않아요. 그럼 이번엔 아래에 있는 설치작품의 제목을 맞혀보실래요?



왕초보> 전혀 모르겠는데요. 대체 무엇을 표현한 거지요?

이규현> 바로 그거 ‘무엇’이 여기엔 없어요. 아니, 있지만 그게 특정 사물이 아니에요. 이 작품의 제목은 ‘숲’입니다. 작가 최정화는 폐품, 하찮은 것을 이용해 설치작품을 즐겨 하는데, 이 작품은 싸구려 초록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두 개씩 붙인 뒤 그런 바구니 수백쌍을 전시실 한쪽에 쌓아둔 것이에요. 아무리 작은 요소, 힘없는 요소라도 이렇게 모이면 숲과 같은 웅장함, 대단함을 가질 수 있다는 주제를 표현한 것이지요. 하지만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게 ‘숲’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숲의 전통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만일 작가가 ‘숲’을 보여주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실제 나무를 심어서 숲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재현했겠지요.

왕초보> 그러니까, 무엇을 재현하는 게 목적이 아닌 현대미술작품을 보면서 무엇을 재현했는지 알아내려고 머리 쥐어뜯지 마라, 이 얘기군요.

이규현> 네, 바로 맞아요. 어떤 작가는 작품이 뿜어내는 분위기를 같이 느끼자고 하고, 어떤 작가는 작품에 사용한 재료, 즉 물성(物性)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미술은 으레 무엇을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현대미술을 보면서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무엇을 그린 것일까’ 고민하다가 괴로워지는 것이지요. 미술작가들이 표현의 방법과 소재선택에서 자유로워진 것처럼, 우리 관람객들도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훨씬 편하게 미술작품을 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보라고 말하는 것이랍니다.

Posted by slow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