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필자2008. 12. 23. 12:07

‘왕초보와 이규현의 미술이야기’는 미술을 처음 접하는 일반인 왕초보씨와 미술평론가 이규현이 나누는 대화형식으로 쓴 미술 에세이입니다. 이규현은 조선일보 미술담당 기자를 거쳐 현재 연세대와 중앙대에서 교양미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림쇼핑’, ‘미술경매이야기’ 등의 책을 냈습니다.

글은 필자의 시각대로 쓰실 것이므로 아트폴리의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이 여러분들께서 미술과 가까워지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하이카 다이렉트의 웹진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왕초보: 최근 신문에서 마이클 잭슨을 수묵화로 그린 그림을 보았어요. 서양의 대표적인 팝문화 아이콘을 영락없는 우리 동양화로 그려 놓았다는 게 참 재미있었어요.

이규현: 젊은 작가인 손동현(28)의 작품을 보셨군요. 손동현은 슈퍼맨, 슈렉, 터미네이터, 마이클 잭슨 등 서양문화의 특징을 ‘똑 떨어지게’ 보여주는 전형적 소재를 택해 우리 식으로 바꿔 놓습니다. 최근 열린 그의 개인전에 바로 마이클 잭슨의 초상화들이 걸렸는데, 수묵채색이라는 재료도 그렇지만, 마이클 잭슨을 나무 좌대나 붉은 어좌에 앉혀 놓는 식으로 그림의 세부적인 내용조차 조선시대 사대부•왕의 초상화에서 빌어 왔습니다. 재미 있는 발상이지요. 단지 그린 방식만 동•서양 퓨전이 아니라, 마이클 잭슨이라는 세계 대중문화의 황제를 동양의 문맥 안에 넣어서 그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 주는 점에서 주제도 퓨전입니다. 이 참에 현대미술 작품에서 나타나는 퓨전 현상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그림1: 손동현 ‘왕의 초상’(2008)>

왕초보: ‘퓨전 미술’이 하나의 트렌드라는 얘기인가요?

이규현: 네, 그렇습니다. 두 가지 상반된 요소가 의도적으로 충돌하면서 공존하는 것이지요. 특히 젊은 작가들 작품에서는 동•서양의 문화가 종종 섞이곤 하는데, 우선 기법에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아트폴리’의 첫 페이지에서 ‘재료 및 기법’을 선택한 다음 ‘수묵’을 클릭해보세요. 수묵화들이 나오긴 나오는데, 수묵화라니까 수묵화인지 알겠지, 언뜻 이미지만 봐서는 연필화인지 수채화인지 구분이 안 가지요. 종이에 수묵을 써서 그렸지만, 택한 소재나 표현방법이 서양화와 다를 바가 없거든요. 박미희의 ‘빌리지 스토리(Village Story)’는 연립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선 전형적인 도시풍경을 그렸지요. 온통 한밤처럼 조용한데, 동네 한 구석에 로봇 태권브이가 서 있습니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꿈과 추억이 어려 있는 도시의 느낌입니다. 그림의 소재나 주제는 매우 현대적인데 그린 방식은 수묵화예요. 기법과 소재만 동•서양이 섞인 게 아니라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 또한 서구적이면서 동시에 토속적이지요.

<그림2 : 박미희 ‘빌리지 스토리: 태권브이’>

왕초보: 그러고 보니 이런 퓨전풍 그림을 많이 본 것 같아요.

이규현: 사실 동•서양의 퓨전은 현대미술에서, 특히 아시아지역 작가들의 현대미술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뚜렷하게 나타나 왔습니다. 비단 동•서양 문화뿐이 아니에요. 상반되는 두 개념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퓨전’이라는 주제는 20세기 후반 이후 현대미술의 전반에 흐르는 중요한 개념이에요. ‘퓨전’을 좀 더 학구적으로 말하면 ‘경계 허물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세계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백남준도 결국은 예술과 과학이라는 상반된 개념 사이의 경계를 탐구했다고 할 수 있지요. 방법적 측면에서는 과학기술을 예술의 재료로 썼고, 주제적 측면에서는 예술과 과학이라는 완전 상반된 두 개념이 공존하는 현대사회를 읽어낸 것이지요.

왕초보: 현대미술이 단지 외형적으로 두 가지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주제면에서도 현대사회의 ‘퓨전’적 특징을 표현한다는 얘기군요.

이규현: 맞아요. 이를 테면 미술작품이 작가 자신이나 사회의 ‘정체성 애매모호함’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결국은 ‘경계’라는 주제와 일맥상통합니다.

왕초보: 조금 어려워지려고 하는데요, ‘경계’가 왜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을까요?

이규현: 매우 좋은 질문! 현대사회에서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예전만큼 뚜렷하지 않습니다. 현대로 올수록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고급과 저질 하는 식으로 이분법적인 대립의 양상이 뚜렷하지 않지요. 이런 특징이 미술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에요. 지난 시간에 얘기했던 팝아트는 바로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문 것 아니겠어요?

왕초보: 경계가 불분명해진 사회에서 경계가 불분명한 예술이 나온다?

이규현: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현대미술은 소재와 주제면에서 ‘경계’ 탐구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미술관 전시를 다니다 보면 이런 관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적잖이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지난달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에서 했던 한국현대작가들의 그룹전 제목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읽기’ 였어요. 현실(진실)과 허구(가짜)가 구분이 되지 않고 어떤 때엔 그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둘이 혼재해 있는 현상을 표현한 작품들이었어요.

<그림3: 마이클 주 ‘보디옵푸스케터스’(2006)>

왕초보: 두 가지 상충된 개념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것은 작가들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한가요?

이규현: 그렇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국제화 덕분에 국적을 여러 개 가지거나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이른바 ‘코즈모폴리탄 작가’가 많아지니까 국가 정체성, 민족 정체성이 미술에 단골주제로 등장하게 되었어요.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았던 마이클 주의 설치작품 ‘보디옵푸스케터스’는 반가사유상의 머리를 빙 둘러서 수십 개의 소형 카메라를 설치한 뒤 카메라가 찍은 반가사유상의 표면을 전시장 뒤편 벽에 걸린 수십 개의 스크린에 나오게 한 것이었어요. 작품의 외형부터 주제까지 현대와 과거, 동양과 서양이 상충하고 어울리면서 고민하는 것인데, 이 작가 자체가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자란 교포 2세이기 때문에 더욱 ‘경계’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겠지요.

왕초보: 미술이 현재 사회와 사람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군요.

이규현: 바로 그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 미술이 그 어떤 예술보다도 현재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겠지요? 그 작품이 탄생하는 그 시기 그 사회의 모습을 가장 예민하게 반영하지요. 그것이 미술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Posted by slow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