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트폴리’ 제공으로 '하이카다이렉트 웹진'에 연재되는 '왕초보와 이규현의 미술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왕초보: 겨울방학이고 새해인데, 오늘은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가 볼만한 미술전시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이규현: 반가운 질문입니다. 미술을 이해하려면 무조건 보는 수 밖에 없어요. 많이 볼수록 많이 보이는 법이니까요. 마침 좋은 전시가 하나 열리고 있어서 추천합니다.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하는 ‘한국근대미술걸작전: 근대를 묻다’인데요. 20세기 초·중반 우리나라의 대표적 작가인 박수근, 이중섭, 이쾌대, 구본웅, 오지호, 유영국, 김환기, 천경자 등의 작품 2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입니다.
왕초보: 모두 이름이 귀에 익은 화가들인데요.
박수근 ‘아기 업은 소녀’(1953)
왕초보: 예를 들면요?
이규현: 이번 전시의 간판작품으로 나온 박수근의 유명한 그림 ‘아기 업은 소녀’(1953)를 볼까요? 누나가 어린 동생을 업고 있는 그림은 박수근을 비롯해 이 시절 화가들의 그림에 흔히 등장하지요. 하지만 그냥 무심하게 보지 말고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가만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이 시절 평범한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버지는 전쟁터에 나가 없고, 엄마는 대신 가장이 되어 밭에 나가고 장터에 나가고, 그래서 아이들끼리 알아서 클 수 밖에 없었던 시절. 2009년 덕수궁에 발을 디디는 우리는 그림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의 슬픈 모습을 엿보고 오는 것이지요. 지난번에도 말했듯, 미술은 그 작품이 생산되는 시기의 사회상을 민감하게 반영합니다. 사진이나 기록처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에요. 우리 보통사람들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들의 눈에 의해, 주관에 의해 사회상이 반영되는 것이니까요.
왕초보: 그런데 20세기 초반 우리나라의 상황을 반영하는 그림들이라니, 그러면 전시를 보면서 마음이 우울하겠는데요.
이중섭 ‘애들과 물고기와 게’(1950년대)
구본웅 ‘친구의 초상’(1935)
이규현: 네, 그것도 재미 있는 현상이에요. 그런데 이런 전시에 지금 관객이 몰리는 것 역시 지금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요? 국내외 안팎으로 경제적 여건이 정말 안 좋은 때라서, ‘어려웠던 그 시절의 그림’이 더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왕초보: 아, 그럴 수 있겠네요.
이규현: 언젠가 우리가 팝아트 얘기를 했었지요? 팝아트가 대히트를 친 1960년대 미국은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었어요. 그러니 1회성 소비문화와 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미술이 인기였던 것은 이상할 게 없지요. 그런데1970년대에 미국의 경기가 가라앉았을 때엔 대지미술,퍼포먼스 같은 시장거래가 불가능한 미술이 되레 인기였답니다. 미술은 음식이나 패션 같은 유행이에요. 유행은 사회적·경제적 상황에 따라 민감하게 바뀌지요.
왕초보: 그럼 경기불황인 작년과 올해를 계기로 미술 트렌드도 바뀔 수 있단 말인가요?
이규현: 경제가 지금처럼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면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일단 미술시장의 거래가 뚝 떨어진 것은 당장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러니까 시장의 구조에도 변화가 조금씩 오고 있어요. 이를테면 최근 인사동의 주요 화랑들이 고가 미술품이 아니라 기성 작가들의 저렴한 소품을 많이 다루기 시작했어요. 더 나아가, 젊은 화가들의 온라인마켓인 ‘아트폴리’에서는 연말부터 작가들의 그림을 아예 몇 만원이면 살 수 있는 포스터와 단면카드(그림엽서)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지요. 이 모든 게 미술이 수요자인 관람객과 컬렉터들의 상황과 눈치를 봐가며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왕초보: 미술은 정말 시대를 민감하게 반영하는 예술이군요.
이규현: 네, 그래서 제가 미술을 좋아해요. 다시 ‘한국근대미술 걸작전’으로 돌아가면, 이 전시에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그린 초상화가 많습니다.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중시되던 이전에는 어른들에 눌려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 받지 못했던 아이들이 20세기 초반이 되자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희망의 빛으로서 조명을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사람들 마음 속에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선혈처럼 붉었던 것이지요. 역설적이게도 어려웠던 시절의 그림을 보면서, 그 시절에 희망을 그렸던 우리 화가들을 보면서, 그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 우리들이 희망과 웃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