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필자2009. 1. 29. 00:56

(이 글은 아트폴리 제공으로 '하이카다이렉트 웹진'에 연재되는 '왕초보와 이규현의 미술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왕초보
겨울방학이고 새해인데오늘은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가 볼만한 미술전시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이규현반가운 질문입니다미술을 이해하려면 무조건 보는 수 밖에 없어요많이 볼수록 많이 보이는 법이니까요마침 좋은 전시가 하나 열리고 있어서 추천합니다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하는 한국근대미술걸작전근대를 묻다인데요. 20세기 초·중반 우리나라의 대표적 작가인 박수근이중섭이쾌대구본웅오지호유영국김환기천경자 등의 작품 2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입니다.

왕초보모두 이름이 귀에 익은 화가들인데요.


박수근 ‘아기 업은 소녀’(1953)

이규현
초·중·고 때부터 교과서에 나왔던 작가들이니까요.지난 시간에도 얘기했듯미술은 그 어떤 예술장르보다도 시대성이 매우 예리하게 반영되는 예술입니다이 작가들의 그림에는 20세기 초반 우리나라 격변의 역사가 반영돼 있지요일제와 전쟁의 흔적서구문화의 유입으로 혼동을 겪던 모습 같은 것이 그림 속에 보입니다.

왕초보예를 들면요?

이규현이번 전시의 간판작품으로 나온 박수근의 유명한 그림 아기 업은 소녀’(1953)를 볼까요누나가 어린 동생을 업고 있는 그림은 박수근을 비롯해 이 시절 화가들의 그림에 흔히 등장하지요하지만 그냥 무심하게 보지 말고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가만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이 시절 평범한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아버지는 전쟁터에 나가 없고엄마는 대신 가장이 되어 밭에 나가고 장터에 나가고그래서 아이들끼리 알아서 클 수 밖에 없었던 시절. 2009년 덕수궁에 발을 디디는 우리는 그림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의 슬픈 모습을 엿보고 오는 것이지요지난번에도 말했듯미술은 그 작품이 생산되는 시기의 사회상을 민감하게 반영합니다사진이나 기록처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그래서 오히려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에요우리 보통사람들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들의 눈에 의해주관에 의해 사회상이 반영되는 것이니까요.

 

왕초보그런데 20세기 초반 우리나라의 상황을 반영하는 그림들이라니그러면 전시를 보면서 마음이 우울하겠는데요.


이중섭 ‘애들과 물고기와 게’(1950년대)

이규현사실 그래요김기창장우성이유태의 그림을 보면 우리 한국화가 일본화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 수 있어요아내와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이중섭의 그림을 보면전쟁 탓에 가족들과 함께 살지 못했던 이 젊은 화가가 죽는 순간까지 얼마나 가족을 그리워했는지 느껴지지요. 20세기 초·중반에 살지 않았더라도그림을 통해 그 시절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거예요하지만 그림 속에 꼭 그 시절의 슬픔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에요독서하는 신여성이나 담배 파이프를 물고 고뇌하는 젊은이를 많이 그린 것을 보면근대화 시기에 지향했던 지식인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엿볼 수 있어 재미있습니다램프창문기차자전거신문 등이 주요한 소재로 그려졌는데당시 유입된 서구문화를 보여주는 물건들이국적인 물건들이었지요.

 

구본웅 ‘친구의 초상’(1935)

왕초보그런데 방학 때 하는 전시는 서양 대가들의 블록버스터 전시들이 많던데올겨울엔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걸작전이 인기인 건 독특하네요.

이규현그것도 재미 있는 현상이에요그런데 이런 전시에 지금 관객이 몰리는 것 역시 지금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요국내외 안팎으로 경제적 여건이 정말 안 좋은 때라서, ‘어려웠던 그 시절의 그림이 더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왕초보그럴 수 있겠네요.

이규현언젠가 우리가 팝아트 얘기를 했었지요팝아트가 대히트를 친 1960년대 미국은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었어요그러니 1회성 소비문화와 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미술이 인기였던 것은 이상할 게 없지요그런데1970년대에 미국의 경기가 가라앉았을 때엔 대지미술,퍼포먼스 같은 시장거래가 불가능한 미술이 되레 인기였답니다미술은 음식이나 패션 같은 유행이에요유행은 사회적·경제적 상황에 따라 민감하게 바뀌지요.

왕초보그럼 경기불황인 작년과 올해를 계기로 미술 트렌드도 바뀔 수 있단 말인가요?

이규현경제가 지금처럼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면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일단 미술시장의 거래가 뚝 떨어진 것은 당장 나타나는 현상이지요그러니까 시장의 구조에도 변화가 조금씩 오고 있어요이를테면 최근 인사동의 주요 화랑들이 고가 미술품이 아니라 기성 작가들의 저렴한 소품을 많이 다루기 시작했어요더 나아가젊은 화가들의 온라인마켓인 아트폴리에서는 연말부터 작가들의 그림을 아예 몇 만원이면 살 수 있는 포스터와 단면카드(그림엽서)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지요이 모든 게 미술이 수요자인 관람객과 컬렉터들의 상황과 눈치를 봐가며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왕초보미술은 정말 시대를 민감하게 반영하는 예술이군요.

이규현그래서 제가 미술을 좋아해요다시 한국근대미술 걸작전으로 돌아가면이 전시에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그린 초상화가 많습니다장유유서(長幼有序)가 중시되던 이전에는 어른들에 눌려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 받지 못했던 아이들이 20세기 초반이 되자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희망의 빛으로서 조명을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사람들 마음 속에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선혈처럼 붉었던 것이지요역설적이게도 어려웠던 시절의 그림을 보면서그 시절에 희망을 그렸던 우리 화가들을 보면서그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 우리들이 희망과 웃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Posted by slow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