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필자2009. 3. 21. 17:00

(이 글은 아트폴리 제공으로 '하이카다이렉트 웹진'에 연재되는 '왕초보와 이규현의 미술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왕초보: 그림이 유화, 아크릴화, 수채화, 수묵화 식으로 나뉘는 건 재료에 따라서이지요?
이규현: 그림 옆에 붙은 레이블을 보면 작가, 작품제목, 연도, 그리고 재료가 씌어 있지요. 보통 재료는 무심하게 지나치는데, 사실 매우 중요합니다. 화가에 따라 쓰는 재료가 다 다르고, 재료에 따라 그림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지요. 값도 달라진답니다.

왕초보: 각각 어떤 특징이 있는 지 설명해주세요.
이규현: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건 ‘유화’일 거예요. 안료를 기름으로 녹여서 쓰기 때문에 영어로는 그냥 오일(oil) 또는 오일 페인팅(oil painting) 하면 유화를 뜻해요. 우리말로는 '캔버스에 유채'라고 씌어 있으면 유화죠. 기름이 들어갔으니 그림 표면에 당연히 광택이 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서양화가들이 가장 많이 쓴 재료가 유화인데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이나 피카소, 마티스 같은 서양 근대미술사의 대가들 대표작은 다 유화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유화는 깊이 있고 중후한 맛이 있는 대신, 화가 입장에서는 다루기 힘들어요. 물감을 섞는 과정도 복잡하고, 물감이 마르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무엇보다도 수십 년 지나면 색깔이 어두침침하게 변합니다. 그래서 요즘 화가들은 유화 대신 아크릴화를 더 많이 씁니다. 아크릴은 20세기 후반부터 화가들이 유화를 대신해서 쓰기 시작한 새로운 물감인데, 기름 대신 물을 섞어 쓰기 때문에 번들거리는 느낌은 적고 대신 산뜻한 느낌이 있지요. 그리고 유화보다 빨리 마르고 색깔도 덜 변해서 선호하는 화가들이 많습니다. 유화와 아크릴화는 겉으로 보기에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아요.

왕초보: 
수채화는 학교 다닐 때 미술시간에 그려본 거라 익숙하게 들려요. 
이규현: 수채화는 말 그대로 수용성 맑은 물감으로 그린 것이니, 유화나 아크릴화 보다 훨씬 가볍고 맑은 느낌을 주지요. 그 대신 재료가 약하니까 색깔이 더 잘 변하지요. 특히 수채화를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 두어서 그림이 자외선을 지속적으로 받으면 색깔이 점점 바래 없어질 수도 있어요.
왕초보: 그림의 값은 유화가 더 비싸겠지요?
이규현: 아무래도 사람들은 유화나 아크릴화처럼 오래 가는 재료를 쓴 그림을 선호하지요. 박수근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화가인 건 그가 유화를 많이 그렸기 때문이기도 해요. 실제 건국대 경제학과 최정표 교수가 올해 초 낸 보고서에 따르면 재료에 따른 그림의 가격상승률을 봤을 때 유화, 드로잉, 수채화, 판화 순으로 높았어요. 최 교수는 그래서 그림에 투자하려면 작품 유형(재료)도 고려하라고 했지요. 그림 재료에 따라 값이 올라가는 정도가 다르니까요. 제가 아는 한 화가는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딜러가 그 화가에게 부탁했대요. 똑 같은 스타일을 유화로 그려달라고. 그래야 값도 나가고 컬렉터들도 선호하니까요. 
하지만 유화가 주는 무거운 느낌이 싫어서 일부러 수채화를 선호하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이중섭이 대표적인데요, 그는 붓을 휙휙 그어서 나타나는 선(
)의 맛을 중시했기 때문에 두껍고 무거운 느낌의 유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중섭이 남긴 작품 중에는 유화보다 수채화나 드로잉,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가 훨씬 많습니다.


왕초보: 
수묵화는 먹으로 그린 것을 말하나요?
이규현: 네, 그런데 현대미술에서는 먹으로만 그린 수묵화보다는 채색을 함께 한 수묵채색화가 더 많이 있지요. 동양의 전통적인그림이기 때문에 수묵화를 그냥 동양화라고도 하고 요즘은 한국화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동양화, 한국화, 일본화 같은 말에는 미묘한 화풍의 차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재료를 기준으로 나눠 말할 때는 수묵화 또는 수묵채색화라고 하는 게 낫지요. 수묵채색화에 쓰는 물감은 '한국화용 물감'이 따로 있어요. 수묵채색화가들의 작업실에 가보면 이런 전용 물감을 물에 타서 병에 담아 놓고 먹물처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경자는 몽환적인 색채로 꽃, 여인, 뱀을 그려서 그의 그림을 사진으로 보면 꼭 서양화 같지만, 사실은 수묵채색화이지요. 수묵채색화는 보통 캔버스가 아니라 전통 종이에 그립니다. 그런데 '한국화용 물감'은 수채화처럼 햇빛에 약하고, 종이는 습도변화에 아주 약해요. 그래서 수묵채색화는 유화나 아크릴화보다 보관에 훨씬 주의해야 해요. 자외선을 직접 받는 곳에 두면 절대 안되고, 습도 많은 곳에 두면 곰팡이가 슬기 쉬우니 조심해야 해요.


왕초보: 가끔 ‘혼합재료’라고 써 있는 것도 있는데 그 건 뭐죠?
이규현: 좋은 질문인데요, 요즘 현대미술은 유화, 수채화, 수묵화 이렇게 하나만으로 그린 것보다는 ‘혼합재료(mixed media)’인 것이 더 많아요. 사진 위에 물감으로 다시 그린다든지, 물감에 돌가루나 흙을 섞는다든지, 아니면 아예 캔버스 위에 엉뚱한 재료인 풀, 꽃, 나비, 헝겊, 그릇조각, 곡물 같은 것을 붙이기도 하지요. 이동재라는 젊은 화가는 캔버스에 곡물을 붙이는 독특한 방법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가수 현미의 초상화는 현미(玄米)를 붙여서 만들고, 라이스 미국 전 국무장관의 얼굴은 쌀(라이스)로, 영화 미스터 빈의 주인공은 콩(빈)으로 만드는 식이지요. 100년전 화가들은 다 똑같이 캔버스 위에 유화를 그렸지만, 이제 화가들에게는 얼마나 남들과 다른 재료를 독특하게 쓰느냐가 중요해요. 재료가 작품의 일부니까요. 그림을 그리는 바탕도 캔버스, 종이 이런 식으로 하나만 쓰란 법은 없어요. 화가 황주리는 캔버스 위에 원고지를 붙이고 그 위에 그립니다.

왕초보: 듣고 보니, 어떤 재료를 쓰냐에 따라서 화가의 스타일이 결정되겠는데요.
이규현: 네, 아주 중요한 얘기에요. 어떤 재료를 어떤 방법으로 쓰느냐 하는 문제. 한국추상미술의 산 역사라고 불리는 박서보는 닥종이를 물에 10일 이상 담가 흐늘흐늘하게 만든 뒤 캔버스 위에 붙여서 작업을 해요. 종이를 줄줄이 찢고 굳히고 하는 작업을 반복해서 밭고랑 같은 무늬를 만들지요. 그렇게 해서 그림에서 동양적인 사색의 분위기가 배어져 나옵니다. 마크 퀸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화가는 자기 피를 뽑아 모은 다음 굳혀서 조각을 하기도 했어요.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는 것은 예술가들의 영원한 숙제예요. 우리는 예술가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요.

Posted by slow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