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필자2009. 8. 15. 22:46
‘왕초보와 이규현의 미술이야기’는 미술을 처음 접하는 일반인 왕초보씨와 아트저널리스트 이규현(artkyu.tistory.com)이 나누는 대화체의 미술 에세이입니다. 이규현은 조선일보 미술담당 기자를 거쳐 프리랜서로 신문과 잡지에 미술 기사를 쓰며 대학에서 교양미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림쇼핑’ ‘미술경매이야기’ 등의 책을 냈습니다. 본 글은 [모두를 위한 미술]을 기치로 미술 대중화를 지향하는 온라인 미술장터 ‘아트폴리’(www.artpoli.com)에서 제공합니다.

왕초보: 개념미술이란 무엇인가요?
이규현: 쉽게 말해 미술작품의 외형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미를 더 중시하는 미술입니다.
왕초보: 이해 안되고 이상한 미술 중 상당수가 개념미술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죠?
이규현: 하하, 사실 그렇게 봐도 돼요. 전통적으로 미술은 시각예술이기 때문에 ‘외모’가 중요했지만, 개념미술은 그 전통을 거부했으니까요. 우리가 전통적으로 ‘미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뿌리째 흔들어서, ‘미술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고, 이를 통해 20세기 서양미술의 궤도를 바꾼 게 바로 개념미술이지요. 그 시작점부터 봅시다.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건너 온 마르셀 뒤샹이라는 작가가 1917년에 남성용 소변기 하나에 ‘R.Mutt 1917’ 이라고 서명만 덜렁한 것을 작품이랍시고 뉴욕의 한 전시에 출품하려 했어요. 자기가 심사위원으로 있는 전시였는데, 당연히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거절 당했지요. 이 ‘작품’이 서양미술사에서 그 유명한 ‘샘(Fountain, 1917)’이라는 건데요, 작가가 창작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R.Mutt’라는 서명조차 작가의 이름이 아니라 그 소변기를 만든 회사의 이름이에요. 그냥 시장에 가면 살 수 있는 기성물건이지만 그 물건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있어야 할 형태로 있지 않으면 원래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게 뒤샹의 설명이었어요. 뒤샹이 미술작가로서 한 일은 이미 있는 물건의 이미지에 그 이미지가 원래 가지고 있지 않던 전혀 새로운 의미를 준 것뿐이었어요.
왕초보: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미술작가가 왜 필요한가요?
이규현: 미술작가의 역할이 달라졌다는 것이지요. 뭔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게 아니라, 원래 있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게 미술작가의 새로운 역할이라는 거죠. 뒤샹은 소변기 이전에도 이미 자전거바퀴, 와인꽂이 등을 그대로 갖다 놓는, 조각 아닌 조각을 만들었어요. 뒤샹의 이런 작업을 통해 물건들이 원래의 기능과 의미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의 이런 시도는 당시 매우 이상한 것이었지만, 훗날 수많은 현대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어요. 그래서 뒤샹은 ‘레디 메이드(Ready-Mades) 예술’의 선구자로 미술사에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사진1) 마르셀 뒤샹 ‘샘’(1917)




(사진2) 마르셀 뒤샹 ‘와인꽂이’(1914)



왕초보: 1910년대에 그랬으니, 꽤 일찍 개념미술이 생겨났군요.
이규현: 20세기 서양미술은 기존에 우리가 ‘미술’에 대해 내렸던 정의를 깨부수는 것에서 시작했으니까요. 하지만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라는 게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은 1960년대 말부터입니다. 이 당시 작가들은 본격적으로 미술의 언어적 기능이나 의미적 기능에 집중했어요. 미술이 시각예술이기는 하지만, 완성되어 나온 이미지 보다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나 그런 과정에 작가가 담은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결과물로 나온 작품의 외형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겉으로 보기엔 ‘이게 미술이야?’ 싶은 게 많이 나온 게 당연하겠지요? 그래서 개념미술은 그림이나 조각 보다는 언어, 기록물, 사진, 그래프의 형태로 나온 게 많아요. 개념미술의 이론을 확립한 사람으로 꼽히는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대표적인 작품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One & Three Chairs, 1965)’를 봅시다. 전시장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의자 뒤 벽에 그 의자의 사진, 그리고 사전에서 ‘의자(Chair)’라는 단어를 찾아 확대복사한 종이가 붙어 있어요. 의자의 실재 형상, 그것을 재현한 이미지, 그리고 의자를 설명하는 언어, 이 셋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가 머릿속에서 ‘의자’라는 물건을 인식할 때에는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을 떠올리는 걸까, 이 셋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일까, 관객에게 이런 생각을 해보도록 만드는 게 곧 이 작품입니다. 의자라는 물건의 외형을 보여주는 게 작품이 아니란 말이지요.  

(사진3) 조셉 코수스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One & Three Chairs, 1965)’



왕초보: 그림은 없이 글자, 숫자, 설명으로만 된 미술이 많은데, 모두 개념미술 영향이군요.
이규현: 그렇지요. 개념미술이 이전의 미술과 가장 큰 차이는 미술의 외형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겉보기에는 전혀 미술 같지 않은 게 많은 거예요. 예를 들어 지금 뉴욕에서는 ‘플로트2009(PLOT09)’라는 국제공공미술축제를 하고 있는데, 여기 전시된 작가 마크 왈린저(Mark Wallinger)의 ‘여객선(Ferry)’이라는 작품을 좀 보실래요? 이 사진 중 어떤 게 그의 작품인 것 같으세요?

(사진4) 마크 왈린저 ‘여객선(Ferry, 2009)’



왕초보: 글쎄요,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는데, 작품은 어디 있는 거죠?
이규현: 이 배는 맨하탄에서 남쪽으로 7분 정도 떨어진 작은 섬에 있는 이 공공미술제의 전시장소로 사람들이 이동할 때 타는 여객선입니다. 그런데 여객선 위에 보면 왼쪽에 ‘염소(Goats)’, 오른쪽에 ‘양(Sheep)’이라고 커다랗게 간판이 붙어 있는 게 보이죠?
왕초보: 설마 그 게 미술작품이라고요?
이규현: 네. 이 간판 때문에 승객들은 배에 오르는 순간부터 자동으로 두 그룹으로 선명하게 나뉘게 돼요. 이 게 바로 미술작품이라는 것을 거의 아무도 의식 못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사소한 것에서부터 좋고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우리와 남 등으로 늘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우리를 비꼬는 겁니다. 늘 남을 평가하고 둘로 가르는 당신, 당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양과 염소의 두 그룹 중 하나로 나뉘어져 있다고.
왕초보: 두 가지 의문이 드는데요, 첫 째 그런 설명을 듣지 않으면 관객들이 어떻게 그 게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 작품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둘 째, 이런 경우 작가가 간판을 직접 만들 필요도 없는 것인가요?
이규현: 개념미술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작가의 의도가 전부이기 때문에 설명이 수반되어야 하는 미술이에요. 그리고, 비단 개념미술이 아니더라도 현대의 많은 미술작품에서 이미 ‘작가가 작품을 직접 만들 필요’는 깨졌다고 봐야 해요. 마치 건축가가 벽돌 바르며 직접 집을 짓지 않아도 그 건축물의 작가인 것처럼, 미술작가도 마찬가지가 되었지요. 물론 아직도 회화나 손수 만든 조각처럼 작가의 손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작품이 많이 있고, 그런 미술이 중요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형’ 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한 개념미술에서는 작가의 손이 직접 개입될 필요가 없어진 거예요. 어떤 개념미술 작품은 아예 어떤 작품이 없이 작가의 아이디어를 적은 텍스트만 있는 것도 있어요. 작가가 1회성 퍼포먼스를 하고 그 기록을 남긴 것이 작품이 되기도 하고요. 이런 개념미술에서는 뭔가 창작물의 형태로 남는 작품의 결과물이 거의 의미가 없는 겁니다. 
왕초보: 그렇다면 그림을 못 그리는 저도 미술작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규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미술이 지나치게 개념화해서 시각예술로서의 특징을 잃었다는 반발로, 20세기 후반부터 다시 손에 물감 묻히는 옛날식 미술이 또 큰 힘을 얻습니다. 미술도 유행이고,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개념미술은 20세기와 21세기 현대미술에서 ‘대체 미술이 무엇이고 미술작가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끝없이 나오게 한 불씨가 되었습니다. 미술작가가 단지 손재주가 좋은 기능인이 아니라 지식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 준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Posted by slowblogger